이철수 사건 연대별 기록 1

1973년 6월 3일.
오후 6시 30분경,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단(와칭파) 고문인 입이택이 피살당함.

1973년 6월 7일.
이철수 체포됨

1973년 6월 28일.
살인혐의로 기소. 관선변호사 클리포드 굴드 (Clifford Gould) 선임됨.

1974년 4월 2일.
새크라멘토 지법에서 이철수 재판이 열림. 법원에서는 개인변호사인 해밀턴 힌츠 (Hamilton Hintz) 씨를 변호사로 선임하여 변호를 맡김

1974년 6월 3일.
첫 공판에 목격증인 3명만 출두시켜 일사천리로 재판 진행함.

변호사가 심장마비 증세로 입원하면서도 재판연기 신청은 하지 않고, 7월 10일 이철수에게 종신형을 선고, 트레이시 (Tracy) 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됨

1977년 11월 18일.
듀엘교도소 (D.V.I)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하고 특별면회를 하게 됨. 당시 유재건은 캘리포니아 주립 법과대학원 (U.C Davis Law School) 을 졸업하고 미 연방정부 법률구조회의 (Legal Aid Society) 의 지역사회변호사 (Community Lawyer) 로 일을 하고 있었음.

이철수와 면회를 마치며, 1973년 사건을 변호했던 힌츠 변호사 사무실에 있는 재판기록 열람을 요청하는 이철수의 위임편지를 들고 힌츠 변호사실에 찾아감. 

우여곡절 끝에 변호사와 협의하에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무실 안에서만 열람하게 되어, 약 2개월간 이경원 기자와 유재건 변호사가 경찰기록과 재판기록을 자세히 검토하게 됨.

1977년 12월 4일.
김익창 박사 댁에서 대책회의 개최.

1978년 1월 29일.
약 3개월간의 수천 페이지의 재판기록과 경찰조사 기록을 토대로 철수와 그 어머니와의 면담 등을 거쳐 드디어 <새크라멘토 유니언> 지에 억울한 재판, 특집기사를 발표함.

차이나타운의 앨리스 사건 (Alice on China Town) 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특집으로 보도되면서 전 미국에 살고 있는 30여 만 동포에게 '긴급동의' 를 하게 됨.

1978년 2월.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지사장 강우정과 임승쾌 편집국장 그리고 지역의 초기이민 전문직 종사자들과 이 사건에 관해 의논함.

1978년 3월 4일.
새크라멘토에서 '이철수 재판 후원회 (Committee for Cholsoo Lee's Legal Defence' 발족. 

이경원, 김익창, 그레이스 김, 유재건 등이 참여.

1978년 3월 7일.
샌프란시스코 후원회 발족 (차원태 목사 등)

1978년 4월 7일.
로스앤젤레스 후원회 발족 (차국찬 목사 등). 철수의 구명운동이 전 미주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인권단체들이 사건해결에 참여하였고, 재심신청을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이 시작됨.

'철수를 구하자 (Save Cholsoo Lee)' 배지, 티셔츠 등을 판매하고 영화, 콘서트, 댄스파티 등을 통해 모금활동을 전개함. 각지에서 이철수 사건 발표회 개최.

1978년 4월 14일.
거짓말 탐지기 전문가인 샌디에이고의 벡스터 박사가 후원회 요청으로 이철수 면담. 실험 결과, 이철수는 분명히 "범인이 아니다" 라고 발표.

옥중살인사건인 제2사건을 담당하게된 스턱턴의 관선 변호사 레오나드 타우만 (Leonard Tauman) 이 선임되어, 후원회와 같이 재판전략 수립.

타우만 변호사는 효과적인 재판을 위해, 1974년 재판 당시 검찰들이 변호인에게 제출하지 않은 중요한 기밀서류를 찾아냄.

1978년 5월 4일.
뉴욕에서 페기 사이카 (Peggy Saika) 가 중심이 되어 후원회 조직.

1978년 5월 7일.
새크라멘토에서 처음 4개 지역 합동후원회 총회가 열렸음.

1978년 7월 17일.
제2옥중사건 담당재판지인 스턱턴 지법에 제1사건이 부당하게 진행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재심청구 (Habeas Corpos 라는 영미법의 전통인 인신보호령) 를 접수시킴.

이날은 한국의 제헌절, 이철수 후원회에서는 이날을 이철수 후원의 날로 정하고 재판장 앞뜰에 모여 이철수를 위한 예배에 이어 시위를 벌임.

1978년 7월.
클리프 벡스터 박사가 거짓말 탐지기 실험 결과, "이철수는 100% 범인이 아니다" 라며 법정에 증인서 제출.

1978년 9월 15일.
후원회에서 레오나드 와인글래스 변호사를 선임하여 타우만 관선변호사와 함께 사건을 맡게 함.

파파스 판사는 사건을 1974년 재판지였던 새크라멘토 지법으로 이송. 파파스 판사는 이송하면서 재심이 필요한 사건 같다는 개인 의견서를 5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으로 첨부함.

1978년 9월 27일.
새크라멘토 지법에서 버스코비치 판사가 맡았다가 다시 칼튼 판사에게 사건이 넘겨짐. 인권에 관련한 사건을 많이 취급한 명망 높은 판사가 맡게 되어 후원회 측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함.

1978년 11월 20일.
새크라멘토 지법 재판에 출두한 스티브 모리스는 이철수가 범인이 아니었다고 증언.

1973년 사건 당시 목격했던 사실을 증언하면서 본인이 경찰에 제보했다는 사실 그리고 경찰과 검찰이 한번도 연락이 없었던 일들을 증언.

1978년 12월 5일.
또 다른 증언자들 나타남. 48일간에 걸친 청문회를 마치고 기다림.

1979년 1월 15일.
제2사건인 옥중살인사건 재판 시작.

1979년 1월 18일.
배심원 선정.

1979년 1월 19일.
칼튼 판사, 제1사건 인신구금해제명령을 인정. 재심판결 내림. 검찰은 칼튼 판사의 판결에 불복, 항소함.

1979년 3월 5일. 
스턱턴 지법, 제2사건 심리.

1979년 3월 12일.
배심원 1급 살인으로 유죄 판결.

1979년 3월 22일.
배심원 사형을 구형.

1979년 4월 30일.
<LA Times> 신문은 이철수 사건을 특집으로 다룸.

1979년 5월 10일.
유재건 후원회장 한국에서 사건개요를 설명하고 후원회를 결성, 국내 후원회 활동 개시함.

1979년 8월 3일.
이태영 박사 철수 면회. (한국에서 찾아온 첫 번째 면회 인사)

1979년 9월 6일.
한국에서 연극 '종이연' (장소연 작) 공연.

1979년 9월 25일.
LA에서 철수후원 전국대회 개최.

1979년 10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1인 1달러 모금운동 시작.

1979년 11월 17일 ~ 18일 
스탠포드 대학에서 철수후원 강연회.

1980년 2월 20일.
새크라멘토 제3항소법원 법정에서 제1사건 재심 시작.

1980년 3월 16일.
뉴욕 YWCA 에서 강연회, 뉴욕법대 세미나에서 철수 사건 소개.

1980년 3월 21일.
제3항소법원은 칼턴 판사의 판결을 재확인하고 검사의 항소를 기각.

1980년 4월 3일.
위 항소심 판결 재심신청을 검찰이 제출. 이철수 후원회에서는 검찰에 편지쓰기 운동 전개.

1980년 4월 14일.
제3항소법원에서 항소 기각.

1980년 5월 5일.
데이비스 (Davis) 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 Asia Week (아시아 주간) 행사에 철수재판 후원활동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음.

1980년 5월 29일.
검찰이 상고 포기.

1980년 6월 9일.
한국기독교여성연합회의 이문우 총무 철수 면회.